주수홍 외국어 공부를 (5개국어를) 시작한 이야기 / 동기부여

 

경기도 교육청 CF찍었을때

 내가 고등학교때 공부를 해도 해도 정말 못했다. 지금 생각 하면 어떻게 그렇게 못했는지 모르겠다. 머릿 속에서는 항상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만 가득했다. 광고도 찍었다. 그것도 공익 광고! 경기도 교육청 CF였다. 촬영 대기하고 대본 숙지하고, 그때 알았다. 난 NG한번 안내고 원컷으로 소화했다. 감독님도 놀랐다. 예고생들도 있었는데 내가 더 잘한다고 했었다.

 그러던중 고2가 되어서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생물학의 신세계를 알려 주셨다. 교과서 내용 뿐 아니라 궁금증이 있으면 항상 대학생들 전공책을 던저 주시며 “니가 찾아봐!”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궁금증을 해결후 책을 돌려드리며 선생님께 정답을 말씀 드리고, 선생님이 피드백 해주시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과학에 빠지기 시작했다. 화학과 생물 분야는 항상 모의고사 1, 2등급을 차지 했었다. 하지만 나머지 과목들은 정말 못했다.

 그러다 1차 수시로 운 좋게 지방대 4년재를 입학했다. 전공은 생명공학과로! 그것도 수능 100일전에 말이다. 수능 100일 남겨두고 할게 너무 없었다. 보통 남자애들 같으면 PC방에 가서 상주를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부터 나의 학구열이 불타기 시작했다.

 전공서적 공부를 본과생 1학년 수준으로 끝내기로 하고, 동시에 영어 원어민 회화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어를 너무 못했었다. 07년도에 쉽게 말해 영어 시제가 과거, 현재, 미래 인줄 알았으니 할 말 다 했다.

 집앞 외국어 학원 원어민 영어 회화 하루에 두시간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것도 새벽반!. 선택은 탁월했다. 그때 “쭉정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개강일에는 새벽반이 직장인들과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러나 2주가 되면 쭉정이는 빠지고 진정한 학습자들만 남는다. 그렇게 원어민 선생님과 1대 1과외가 되었다.

 그러던중 07년도에 옆 강의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중국어였다. 중국어는 당시 지금의 인식과 달랐다. 중국어 공부 한다고 하면 “미쳤니? 니가 지금 그거 할 때니? 영어나해!” 라고 할 때 였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 언어를 배워 보고 싶었다. 강력한 이끌림 이랄까? 너무 잘했다.

 어머니께는 영어 2시간 한다고 하고서는 2번째 달에는  중국어 1시간 영어 1시간씩 수강 했다. 중국어? 나쁘지 않았다. 그냥 하니까 되는 느낌 이였다. 권설음 부터 발음은 정말 빨리 습득 했었다. 그런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어떻게 외국어를 학습 했는지 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때 초등학생 때 스파이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냥 그게 너무 멋있었다. 단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고 생각 했었고, 초등학생 이였던 주수홍은 용돈 500원 1000원씩 모아 일본어 책을 샀다. 그것도 30대 아저씨 들만이 이해 할 수 있던. 그렇게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모두 외웠으나 초등학교 3학년이 혼자서 진도를 나갈 수는 없었다.

 그 잠재의식이 머릿 속에 남아서 시작 했던 것이다.  1달이 지나 갈때 어머니께 중국어 수강증을 들키는 바람에 집에서 쫒겨 날 뻔 했다. “영어나 해!” 난 아직도 어머니께 정말 감사하다. 중국어 공부 할때 그렇게 박해해 주셔서다. 교회도 집에서 가지 말라고 하는 애들이 더 절실히 믿고 신앙생활을 모태신앙 보다 더 열심히 한다. 난 그것 때문에 더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갈망을 중국어 선생님이 2달 이라는 짦은 기간동안 모두 채워 주셨다.그리고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아주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 중국어로 가능 할 때 였다. 08년도 1학기가 지나갈 무렵 학교 홈페이지에 공고가 올라 왔다. 중국어 1달 단기 어학연수 코스 였다. 개인이 내는 돈도 한달동안 30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 이였고, 항공료, 숙식비 모두 학교에서 지원이 나왔다.

 면접도 없이(당시 중국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중문과만 우루루~ 신청하고 타과는 몇명 없었다.) 중국 요성에 도착했다. 중국 요성은 산동성에 있었다. 청도와 그나마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정말 신세계였다. 내가 수시 붙고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기에, 나에게 중국이라는 의미는 매우 컸다.

그러던 어느날 TV에서 “베이징 환잉니”(베이징은 당신을 환영합니다.)가 흘러 나왔다. 베이징 올림픽으로 베이징을 선전하는 노래였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 “베이징으로 가라!” 그때가 금요일 오후 2시였다. 3시에 핸드폰, 여권, 지갑을 챙긴채로 요성대학교 위원장님을 뵈러 갔다.

 위원장님은 여자 분이 셨는데 그 포스가 장난이 아니였다. 눈빛 하나로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그런 분이셨다. 나는 다짜고짜 “저 베이징 갈래요!”라고 중국어로 말했다. “무슨 이유로? 너 못가! 공부해야지!”. 난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저, 한국에서 중국어 공부 할때 책 앞장에 천안문 광장이 있었어요. 그때 결심했어요! 중국어 열심히 해서 혼자 가겠다고요! 지금이! 바로 지금이 그때에요!”

 위원장님은 시계를 보시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말씀 하셨다. “지금 시간 3시 반! 4시에 베이징 가는 막차가 있단다, 니가 그것을 타면 가는거고, 못타면 못가는 거야! 그리고 월요일 오전 수업 들어오는 것으로 허락을 하는 것이다.”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무작정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잉쭈어 40위안 짜리를 타고 6시간 대장정에 나섰다. 그렇게 기차를 오래 타본 적이 없었다.  기숙사를 들려서 옷등을 챙겨 나올 수도 없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나니 너무 막막 했다.

 요즘은 정말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숙박이나 경로 등을 알 수 있지만, 당시는 2g폰이 였고, 초급 중국어로 북경에 내렸을 때 뭘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때 내 핸드폰에 베이징에서 목회 활동을 하셨던 목사님 번호를 알았고,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목사님의 도움으로 베이징에 있는 한국 민박에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베이징 서역에 오후 11시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시작이였다. 숙소를 가기 위해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가 안섰다. 어두 컴컴하고 늦은 시간이라 덜컥 겁이 나며 친구들의 괴담이 생각 났다. 택시 장기매매 등등 “가지마라고 했던말”

 그때 앞에 있던 공안이 보였다. 나는 중국어로 “저 한국인 인데요 택시가 안서요~ 도와주세요” 그때 공안이 웃으며 손을 폈다. 앞에 있던 택시가 섰다… 내가 아무리 해도 안섰는데…(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곳에는 택시가 정차 할 수 없는 곳 이라 한다) 그렇게 택시에 올랐다.

 택시에 올랐을 때 택시 인신매매 괴담이 생각 났다. 택시 기사도 겁을 먹었다.( 중국인들은 공안을 무서워 한다.) 둘다 서로에게 겁을 먹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분 누구니?” 나도 입을 열었다. “응… 우리 아버지 친구분이셔요.” 그러자 택시기사님 태도가 돌변 했다.

 숙소에 가는 내내 베이징 관광명소와 지나가는 곳을 아주 아주 친절하게 설명 해 주셨다. VIP처럼 숙소에 데려다 주셨고, 첫날은 그렇게 흘러 갔다. 알람을 새벽 4시에 맞춰 놓고 쪽잠을 잤다. 천안문 광장 국기 계양식을 보기 위해서다.

 

 

 

 

 

 

 

 

 

당시 국기계양식 모습

새벽 4시에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국기예양식을 보는 순간 모든 피곤이 사라졌다. 절대 피곤하지 않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 했다.

 

 

 

 

 

 

 

 

이렇게 혼자 자금성에 가서 지나가는 중국인을 붙잡고 사진도 찍어 달라고 하고, 자금성에 들어 가서는 한국 관광객들 주위를 어슬렁 거리면서 설명도 들었다.

 

 

 

 

 

 

 

 

 그리고 중국어를 배웠을때 선생님께서 꼭 가서 먹어 보라고 하셨던 북경오리를 먹으러 전취덕도 찾아 내서 정말 맛있게 먹었었다.

이화원도 갔었고 그렇게 2박 3일간 여정을 마치고 다시 6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월요일 오전 수업을 들으러 갔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두가지를 배웠다. 첫째 아직 그 길을 가보지 안은 사람들은 꼭 다른사람도 그 길이 위험하다며 못가게 한다. 두번째는 떠나는 자에게는 늘 어떻게든 길이 열린다는 것이였다.

무사히 중국에서의 한달을 마무리 한 후 한국에 돌아와 방학때 마다 중국으로 드나들었다. 여행이건 뭐건 방학때마다 모아놓은 용돈으로 중국 가서 상주를 했다. 베이징, 상하이는 물론 악양, 장사, 안휘이, 등등 구석구석 다 돌아 다녔다. 그렇게 중국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렇게 대학교 1학년이 끝나 갈때 쯤이였다. 우리집이 수원 영통인데 삼성 러시아 엔지니어 들이 정말 많다. 어느날 창문을 열어 놓고 책을 읽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들어 보지 못했던 언어였다. 너무 신기해 책을 덥고 뛰쳐 나갔다. 그리고 그사람들에게 어떤 언어 인지물었다. 러시아어 라고 한다 .

 휴학계를 냈다. 정말 러시아어를 배우려고! 이 언어는 내가 배우지 안으면 정말 평생을 후회 할 것 같았다. 전세계가 나를 비난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 친구들 다! 차마 교수님들께는 러시아어 하려고 휴학 한다고 말 못했다. 새벽5시에 일어나서 공부를 했다. 그렇게 러시아어를 배우니 새로운 3달이 되었을 때 였다.

 내 실력을 체크 해보고 싶었다. 시험장에 도착하자 다 전공자들 뿐 이였다. 나는 그냥 3달 만에 내가 얼마나 잘했나?를 알아 보기 위해서 시험을 본 것이다. 당시 한국외대 노어노문과 졸업 FLEX점수가 400점인데 3개월 만에 364점을 받았다. 그렇게 용기를 얻기 시작 했다. 그리고 러시아 친구를 사귀기 위해 다짜고짜 집 주위에 있는 아주대학교 국제협력 센터에 전화 했고, 아주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러시아 친구의 메일 주소를 얻을 수 있었다.

 아직 러시아어가 왕초보 단계 였기에, 집에서 러시아어 타자를 한땀한땀 장인정신으로 메일을 작성하여 보냈고, 답장이 왔다. 지금 내 친구 안톤이다. 지금 생각하면 만나서 친구하자고 타자를 치는 나나, 그걸 읽고 약속장소에 나온 안톤이나. 지금 생각 하면, 참 신기한 인연이다. 그렇게 그 친구랑 만나면 나는 러시아어로 말하고 그 친구는 한국어로 말하며 서로 연습을 했다.

 그친구가 노보시비르스크로 떠난 후에도 우정은 계속 되었다.

 

 

 

 

 

 

 

 

 

 

 

 

 

 

 

 

 

 

 잘 쓰지도 못하는 왕초보 당시라 잘 쓰지도 못하는 러시아어로 삐뚤빼뚤 편지를 적어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로 보냈다. 가는데 한달 답장을 받는데 한달이 걸렸다. 문법도 엉망이고 지금 내가 봐도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그 친구는 이편지들을 복사하여, 빨간 줄로 틀린 부분을 고쳐서 한번에 나에게 보내줬다. 메신저, 스카이프, 페북에 있숙 했던 나지만 2달이 시간이 진난 친구의 소식을 늦게 받아 보는데 나는 아직 손편지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던중 당시 여성가족부에서 주최한 러시아어 탐방 프로그램에 뽑혀 내 인생 최초로 러시아를 방문 했다. 일정은 블라디 보스톡 -> 이르쿠츠크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이였다. 내가 유일하게 러시아어를 구사 했기에 지도자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거의 내가 통솔 했다고 해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심지어 내가 아니였다면 우리는 기차도 놓쳤을 것이다.) 같이 갔던 여가부 직원분과 청소년 센터 관장님도 ” 너 아니였으면 우리는 이거 못했다”라고 하셨다.

 

 

 

 

 

 

 

 

 

 한국에 돌아 와서 오픽이라는 시험을 우리 사촌형으로 부터 알게 되었다. 그냥 봐 보라고 해서 그냥 하루에 몰아서 봤다. 오전에 중국어를 보고 10분인가? 있다가 바로 영어를 봤다. (당시에는 이런 시스템이 가능했다.) 그리고 바로 러시아어도 봤다. 아무 부담 없이. 정말 아무런 부담없이 봤다. 결과는 예상 외로 대박이 났다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사이 좋게 IM2가 나왔다.

 그러던중  “차세대 글로벌 리더 국제 컨퍼런스”라는게 생겼다. 경기대와 경기대가 주최한 행사 였다 각국 유명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보내서 합숙 하며 일주일 동안 토의 결과를 발표 하는 것이였다. 거기서 내 새로운 러시아 친구를 만났다. 원래 한국을 못 올뻔 했는데 내가 주러 한국대사관에 연락하여 모든 수속을 도와 줬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완전 절친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 해서 친구가 되었는데, 알고보니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를 다니고(지금은 졸업후 런던에서 석사중) 나중에 모스크바 놀러가서 알았는데 항공사 CEO아들이였다. 그친구 덕에 초호화 모스크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일어 나면 이친구는 학교 가있고 나는 전화를 하면 기사 아저씨가 밑에서 차를 대고 나를 기다렸다. 얼마전 사업자 냈다고 보냈더니 나보다 더 기뻐했다.

 또 이 친구 소개 받아서 한국 여행 시켜 줬는데, 이 친구와는 어떻게 알았니? 라고 물어보니” 응~ 우리 아빠 석유회사를 그친구 아버지가 인수 했어”  

 외국어를 하다보면 이런 영화같은 일들이 일어 난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신기한 TV서프라이즈” 재연 배우고, 그냥 친구로 지냈는데 놀러가 보니 상하이 갑부집 딸이고… 정말 상상도 못한 친구들. 그것에 중독되면 외국어 그만 못둔다.

 

 

 

 

 

 

 

 

  아무튼 나는 그 컨퍼런스에서 과학 부분 으로 경기도지사 상도 받았다. 이렇게 상을 받고 나니 내 자존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도 조금 할 줄 알고. 그러던 중 부모님과의 불화로 독일로 가출을 결심했다. 이게 뭔 뜬금 없는 일이냐고?

 내가 가고 싶던 인생의 방향과 부모님이 원하던 방향이 달랐다고 해두겠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출 해봤자 안봐도 비디오! 그래서 워홀을 생각 했다. 캐나다, 호주는 애초부터 제외 시켰다. 왜냐면, 남들이 다 가니까 가면 시간 낭비다.

 내가 그 나이에 얻은 교훈은 한가지가 더 있다. 남들 다한다고 불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남들과 다른길을 가면 그보다 더 좋은 교훈을 얻는다. 요즘은 그게 스토리라고 한다. 난 스토리를 계획한게 아니다. 스토리가 나를 따라 왔다.

 그래서 생각 한게 독일이였다. 내 전공이 생명공학이니 관련이 있을 것 같다서 이다. 난 당시 “Guten Tag”(안녕하세요)도 모르는 상태에서 독일에 도착했고, 돈이 없었기에 한식당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임금도 독일 법대로 받지도 못했다. 해외에서는 한국인을 조심하길 바란다.

 그러다 내가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짓을 왜 여기서 하나 싶어 노숙을 하기로 결정하고 한식당을 나와 중앙역에서 노숙했다. 하루에 빵 한조각을 먹으며 이력서를 들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한국 회사들을 찾아 다녔다. 삼성, CJ, 대사관 , 독일학교, 독일교회 등등 다 돌아 다녔다.

 만약 한국에서 내가 직접 이력서를 들고 삼성, CJ 등 대기업을 돌아 다니면 나보고 미쳤다고, 나가세요!, 라고 하겠지만 해외는 다르다. 만났던 모든 직원 분들이 나를 도와 주려 하셨다.

 그러다 하루는 한 노숙자가 나에게 커피를 줬다. 그걸 마시고 정신을 잃었다. 일어나보니 내 호주머니에 있던 3유로가 없어졌다. 다행이 큰돈은 신발 밑창에 넣어 놨기에 금전적 손해는 크지 안았지만, 너무 서러웠다.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일은 해외에서 아플때 가장 서럽다.

 화장실에 가서 미친듯이 울었다. 몇시간을 울었다. 너무 “꺼억꺼억”울어서 청소부가 들어와서 문열라고! 괜찮냐? 등을 물었다. 내가 죽는줄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울고 화장실을 나오자 프랑크푸르트의 높은 건물들이 보였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바로 “독기”였다. 그동안 그런 독기를 눈으로 뽑아 본 적이 없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대한항공으로 가라!” 그렇게 대한항공 사무실을 찾아가서 다짜고짜 “인사담당자 분 뵈러 왔어요” 라고 했다. 그 다음 상황이 더 대박이다.

 인사과장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들어오세요~ 오랜지 주스, 사과주스 있는데 뭐 마실래요?” 뭔가 예감이 좋았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날때 까지 경청해 주셨고, 도와 주신다고 하셨다. 이력서 심사가 끝나고, 그분이 직업관련 하여 집주인에게 확인 전화도 해주셔서 집도 얻을 수 있었다.

 대한항공 프랑크푸르트 공항지점 passenger traffic job(지상직 승무원)으로 처음 들어갔고, 거기서 물러서면 난 큰일 나기에 정말 열심히 했다. 열이 40도 가까이 나도 회사에 나갔다. 그렇게 지점장님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VIP의전 서비스담당을 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출근이 행복했다. 너무 행복했다. 어느 날은 2일 연속 집에도 못가고, 잠도 못자고 공항을 뛰어 다녀야 했지만 행복했다. 비행기가 문을 닫고 푸쉬백 할때 그 느낌! 또한 공항에서도 나는 엄청 유명했다.

 공항에서 공항 직원들을 초대해 축제를 했는데 지점장님이 1등이 BMW라고 하셔서, 잠도 못자고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연습했다. 그리고 그 파급력은 대박이였다. 그 전만 해도 노래가 나오면 듣기만 하던 사람들이 나 무대로 나와 같이 강남스타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지점장님이 행사 참가 하라고 장난 치셨던것…

 그후 공항 출근을 하면 공항 직원들이 나를 보며 “강남스타일이다~!!!” 라고 하며 인사를 했고 그덕에 타 항공사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내가 가서 해결했다. 나를 알아 보고 모든 업무협조를 해줬다.

 그리고 라운지에 프랑스 친구가 있었는데, 나보고 프랑스어를 배워야 한다며 비속어 부터 알려 주기 시작 했다. 나는 좋은 단어를 알려 달라고 했지만 나쁜 단어를 배워야 빠르게 외운다며, 그날 알려준 단어를 친절하게 종이에 적어서 줬다. 

 2013년  졸업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 왔다. 그 친구 덕에 불어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시작은 매우 순조로웠다. 다른 친구들이 발음에서 많이 포기 하는데 나는 그동안 그 친구가 여러 비속어를 알려 주면서, 나도 모르게 발음을 다 마스터 한 것이다.

  그러던 중 내가 구사하는 외국어를 어떻게 하면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하루는 길을 가는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외국어는 뇌에서 나온다” 그리고 내 전공은 “생명공학이다.”

 

  그렇게 나는 도서관에 들어가서 몇일 동안 뇌과학 책을 모두 정독했다. 쉬운일이 아니였다. 세포학, 신경학, 분자생물학, 생화학 등 많은 것들을 공부 해야 했다. 그리고 나의 “사다함의 매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미친사람 처럼 엄청난 일을 하고 나니 그때 서야 외국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단기간에 OPI 불어 IM을 취득 했다. 그리고 나에게 2번째 기회가 왔다. 베이징 교환학생이다.

 내가 베이징 교환학생을 간 이유는 단 하나다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독일어, 불어 자격증을 따고 싶었다. 내가 적립한 수 많은 이론을 나에게 임상 시험을 하기 위해서다.

 6개월간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났고 독일어 공부를 하기 위해 로비에 와서 작문을 하면 독일 친구들이 술마시고 클럽갔다가 5~6시면 들어와서 나를 신기하게 여기며, 내가 작문한 것을 고쳐줬고, 나는 내 커리큘럼과 , 플랜 그리고 학습법대로 하나씩 해나갔다. 물론 중국어로 생명공학 전공 수업을 듣는것은 매우 힘든 일이였다.

 

 그것까지 소화 하고 6개월째 독일어 자격증을 땄고, 7개월 째부터는 조금 편했다. 한국에 돌아 왔을때 내 손에는 영어 오픽 IH, 중국어 오픽IH, 러시아어 오픽 IH, 프랑스어 OPI IM, 독일어 OPI IM이 들려 있었다. 졸업전 목표하던 한국어 제외 5개국어가 완성 되었다.  

주수홍의 외국어 지도

 

이렇게 외국어로 아시아 부터 유럽 아프리카 북미를 내 손에 올려 놓으니 항상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이 이론들을 가지고 한 학기 동안 학교 취업지원팀을 통해 특강 포함 200명이 넘는 학생들을 모아서 특강 및 개인 플랜을 짜줬고, 뇌과학 외국어 학습법도 가르쳤다. 계속 동기부여를 시켰고, 실제로 한번에 2등급이 오르는 학생도 있었다. 또한 누구에게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 친구분 자녀들 컨설팅 과외를 시작 했고, 블로그를 보고 찾아 주는 분들, 그리고 또 소개로 오는 분들… 점점 커지면서 반응은 연쇄 폭발 적이였다.

 내가 여려분들께 정말 해주고 싶은 말은 “단 할발짝만 움직여라!”다 한발짝만 움직이면 그게 나비효과 처럼 미래의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침대안은 따뜻하고, 침대밖은 위험하고, 당신의 책상까지는 아주멀다. 그 한 발짝을 움직이는게 엄청난 염원이 필요 한것도 알고 사실 매우 어렵다.

 나는 금수저도 아니고 흙수저 학생 이였다. 중국 유학을 위해 학원알바 등 모두 모았고 돈을 모아 나 자신한테 투자를 했다. 큰것 부터 말고 주위에 작은것 하나 부터 시작했다.  

 꼭 외국어가 아니여도 좋다. 당신이 한번쯤 “저거 꼭 해보고 싶다”라고 했던 것들이 가슴속에 묻혀 있을 것이다. 그걸 깨워야 한다. 처음에는 주위에서 “너 미쳤어? 왜 그걸 하려 그래?” 절대 듣지 말았으면 한다. 그들은 그들도 가보지 못했기에, 당신이 가는것도 허락 못한다. 만약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 길은 옳은 길이다. 당신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두려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길을 선택 하면 반드시…. 반드시 당신을 도와 주는 사람이 생긴다.

침대 밖으로의 한발짝!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새로운 길이 될 것이다.

이런게 행복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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