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자가 영어회화, 5개국어로 취업, 운명을 바꾼 법

Wntnghd

9월 22, 2025

영포자가 영어회화도 모자라서 5개국어로 취업과 운명을 바꾼 법! 벼랑 끝에 서 본 적이 있다. 한 발만 더 앞으로 내딛는 순간 내 인생은 완전히 나락을 가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것은 나락이라기 보다 나를 물 아래로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내 인생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이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엄청난 괴리 때문이었다. 늘 거울 보면서 난 대단한 사람이야!라고 아무리 외쳐도 중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나는 공부 못하는 골칫거리같이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며 살았다. 동창생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선생이라는 사람들한테까지 말이다.

심연

집에서는 부모님이 사업이 어려워 불화로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불똥은 늘 나에게 튀었다. 학교에서는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 왕따에다가 선생이라는 사람들까지 합세해서 나를 괴롭혔다. 괴롭히는 것 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의 성과나 지식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부정했다. 내가 무슨 발표를 해서 내가 번외로 공부해서 습득한 지식을 말하면 “재 또 저래!”, “나 저애 싫어!” 이게 선생이라는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나는 그냥 숨 쉬는 고깃 덩어리만 같았다. 아무리 안정적으로 마음을 먹으려 할지라도, 아무리 어느 곳에 소속되려고 발버둥을 치더라도, 인정받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하면 할수록 모든 결과는 “0”이었다. 이 경우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은 모든 것들이 안으로 터지게 된다. 바로 우울증이다.

나는 2년간 우울증을 달고 살았다. 심지어 우울증 약을 먹고 부작용으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복통으로 쓰러지기 직전 교무실에 거의 쓰러지듯 기어가서 교무실 소파를 붙잡고 뒹굴 때도 딱 봐도 엄청 아파 보이는 애를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와서는”꾀병 부리지 말라!!!” 이 난리를 쳤다.

그렇게 어영부영 2년이 날아가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대학생활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괴롭힘이 없었을 뿐. 정말 다행인 것은 교수님들이 정말 좋은 분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주옥같은 것은 변화가 없었다.

살고 싶었다.

우울증으로 서울대 병원을 다녔었는데, 하루는 외래 대기실에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어떤 아저씨가 귀신같은 몰골로 내 옆에 앉더니 “정신과 약 먹으면… 약 먹다가 인생 끝나요” 이 말을 했다. 소름이 돋았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아닌 그 환자가 나를 깨웠다. 나는 어쩌면 마블 유니버스의 완다 비전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내 심연 속으로 들어가서 하루에 15시간씩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 현실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거였다.

더 이상 부모님이 사업이 어찌 되던 어찌 되던, 내가 돈을 벌어서 쓰고 싶었다. 우선 이 주옥같은 집에서 벗어 나야 했다. 내가 안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알바를 시작했다. 알바를 해서 그 돈을 모두 영포자 였기에 영어회화와 5개국어 공부를 하는데 돈을 다 쏟아부었다.

내 인생에서의 아주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무리 지방대 학과에서 4.5만 점의 학점을 받는다고 한들, 카이스트던 어디던 사람들이 취업하는 루트는 모두 똑같았다. 전공도 생명공학이었던 지라 석사 박사는 깔고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나는 빨리 우선 돈돈돈 거리는 거지 같은 인생을 먼저 해결하고 싶었다.

그때 아르바이트비를 그냥 모아서 다른데 썼다면 나는 지금쯤 큰 후회를 했을 것이다. 우리 사촌누나들과 사촌 형들이 영어로 성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로지 살아남을 방법은 외국어라고 생각을 했다. 나에게 모든 투자를 했다. 100원 한 장까지다.

나는 대학생 2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영포자였다. 그랬던 내가 각성을 하고 이 지긋 지긋한 지옥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나서 5개국어를 한다고 나대자 모두가 등을 돌리고 무시하고 괄시했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독기를 품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살기 위해 영어회화를 공부했기 때문에, 현실과 내 이상의 괴리를 없애기 위한 몸부림이었기에, 돈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기에, 어디에 취업으로 소속이 되고 싶었기에, 인정을 받고 싶었기에 그들의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매일매일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순간 나는, 이전에 있었던 러시아 문화원에서 학생 대표라는 소속이 생겼고, 경기도 명예 홍보대사가 되어 있었고, 난다 긴다 하는 과학 전공 대학생들에게는 없는 국제 콘퍼런스 과학 부분 도지사상을 수상해 있었고,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 동경의 대상이었던 대한항공 프랑크푸르트 공항지점에서 그것도 대한항공 취업으로 대한항공 소속으로 VIP의 전 담당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돈을 벌고 있었다. 거기다가 이렇게 사회에서 일을 하면서 서울대 나온 사람도 나를 질투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자존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데렐라 맨

이때 모든 것들이 해결이 되었다. 지방대 다니는 청년이 운명을 바꾸기 시작을 한 것이다. 가장 큰 여객기가 하루 걸러 하루 딜레이가 터져 주는 바람에 추가 근무수당이 눈덩이처럼 붙어서 월급이 유로로 통장에 꽂혔고, 2달 안에 대기업 안에서 에이스로 성장해서 아직도 대한항공 프랑크푸르트 공항 지점에서는 전설로 남아있다. 대기업에 소속이 되어 금전적인 부분과 소속에 인정까지 한 번에 모두 받아 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대학교 졸업을 해야 했기에) 5개국어 자격증에 위에 있는 모든 스펙들이 나를 신데렐라 맨으로 만들어 주었다. 4학년 취업할 때 요정 이모님들이 되어 주었다. 화려한 무도회 복장이 필요하니? 5개국어 자격증에 대한 취업 스토리를 이기는 스토리는 없었다.

전공 학점이 3.2이야? 괜찮아! 너의 실력을 증명할 만한 다른 호박 마차인 수상한 경기도 도지사상 과학상이 2개나 되어 쌍두마차가 되었다. 게다가 대한항공 직인이 찍힌 레퍼런스와 근무 증명서 + 인사 담당자가 해당 지점에 전화해서 나에 대해 물어보더라도 나를 인정해 주는 대리님, 과장님, 차장님들이 계셨다.

여기저기서 면접을 보라고 전화가 왔고, 압박질문 “대한항공에서 근무 잘 한거 맞아요?”라고 하면 “직접 전화해서 여쭤보세요~” 가 가능했다. 게다가 사소한 대외활동들(국가 기관에서 한 것들)까지 다 합치면 이력서가 한 장에 들어가지 않아서 취업팀 선생님의 워드 실력이 총동원되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한 장에 욱여넣었다.

면접 때도 자존감 덕에 얼마나 편했는지 모르겠다. 압박 면접 나오면 바로 여기 자소서랑 이력서에 있는 내용 중에 하나라도 거짓이 있는지 증명서 및 상장 발급 한곳에 전화하셔서 직접 담당자에게 내 평판에 대해 확인해 보시라고 했다. 그래서 진짜 그것을 눈앞에서 확인하신 면접관님들도 있었다. 그리고 확인하자마자 급 화기애애 분위기.

내가 원하던 자유였다. 이 모든 것들 말이다. 이렇게 기업에서도 일을 하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내가 원하면 언제든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이 세 가지를 다 해결할 자신이 생겼다. 그래서 퇴사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내가 외국어 공부를 했던 나 주수홍의 뇌과학 외국어 공부법을 가지고 취업 및 운명을 바꾸기 위한 외국어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었다. 처음에는 컨설팅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 유일 5개국어 동시 공부 과정 인강 토트의 도서관까지 말이다. 인정을 넘어서 자아실현의 영역이었다.

그냥 단순 호기심처럼 “미드를 자막 없이 보고파요~”, “취미로 해보고 싶어요~” 같았다면 못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닌, 지방대 스펙을 뒤집어엎어 버리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영어회화와 5개국어에 목을 매었다. 그렇게 운명을 바꿨다.

운명을 바꾸는 5개국어 회화, 취업까지

그 공부 비법

외교부에서도 인정해서 불러 주는 그 공부 비법